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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보낼 배가 없었습니다

진주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리고 열여섯 나라에 배를 보내는 마흔 농가

지난달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진주에서 배 농사를 짓는다는 분이었습니다. 제 번호를 여기저기 물어 알아냈다고 하더군요. 짓다를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들이 만든 영농조합법인에서 배를 직접 수출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한국 농업의 문법은 이랬습니다. 농민은 기릅니다. 수출업체가 해외 바이어를 찾고 계약과 통관을 맡고, 문제가 생기면 그 손실이 다시 산지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농민이 해외시장을 직접 상대한다는 말은 제가 다녀본 현장에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합은 그 순서를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날을 잡아서 진주 문산읍으로 갔습니다.

중간상인의 일이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도착한 곳은 선과장이었습니다. 컨베이어 위로 배가 지나가고 크기와 흠집을 기계가 걸러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여느 산지 선별장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가서 확인한 직수출은 농민 한 사람이 세관 서류까지 혼자 쓴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농민들이 만든 조직이 해외시장을 직접 상대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들은 2017년 홍콩을 시작으로 판로를 넓혀 왔습니다. 지금은 열여섯 나라에 진주 배를 보냅니다. aT와 함께 해외 식품박람회에도 꾸준히 나갔고, 2022년 두바이 박람회에서는 수출업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계약을 맺었습니다.

바이어만 찾은 게 아닙니다. 팔 곳이 정해지기도 전에 할랄과 식품안전 인증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으로 보내려면 과수원과 선과장을 따로 등록해야 하고, 보내는 나라가 바뀌면 요구 조건도 다시 바뀝니다. 검역과 포장 기준을 맞추고 통관 서류를 챙기는 일까지 조직 안에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간상인이 하던 일이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영업도 인증도 검역도 물류도 그대로 필요합니다. 다만 그 일을 하는 자리가 산지 바깥에서 산지 안으로 옮겨 왔습니다.

수출용 배를 만든다는 건 배를 잘 기른다는 말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누가 언제 어떤 작업을 했는지 종이에 남아 있어야 하고, 문제가 터지면 어느 농가 어느 물량에서 시작됐는지 되짚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더 어려운 질문 앞에 섰습니다. 해외 바이어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는 마흔 농가. 이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한 방향으로 움직였을까요.

마흔 농가를 묶은 것은 친목이 아니었습니다

이 조합은 2012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제가 본 조직의 무게중심은 마흔 곳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소수의 농가들이었습니다.

해외 바이어를 찾아다니는 일은 당장 돈이 되지 않습니다. 박람회에 한 번 나갔다고 주문이 계속 들어오지 않고, 인증을 받아놔도 거래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이 돈 안 되는 시간을 그 소수가 먼저 감당했고, 해외에서 확인한 조건을 다시 산지의 규칙으로 번역해 왔습니다.

농가가 마흔이면 농사 방식도 마흔 가지입니다. 방제 시기가 다르고 수확을 언제 할지도 판단이 다릅니다. 국내 가격이 크게 뛰는 해에는 수출로 뺄 물량을 국내에 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 조합은 그 차이를 좋은 뜻이나 친목으로 메우지 않았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실제로 비용이 생기게 만들어 뒀습니다.

참여농가는 공동 재배규정과 출하 원칙을 따릅니다. 기준을 지키지 않은 물량은 그해 수출 출하에서 빠집니다. 자기 농사의 일부를 조직의 판단에 맡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조직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 조직이 아닙니다. 참여농가는 2019년 서른일곱 곳, 2023년 서른 곳, 2024년 다시 마흔 곳입니다. 누가 왜 나갔는지는 이 숫자만으로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빠지고 새 농가가 그 자리를 채우는 조직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사무실 책상에는 농가별 생산기록이 쌓여 있었습니다. 조합의 다음 세대가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 자료를 분석하고, 농가별 방제 시기 같은 걸 되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온 건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록이 권고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지역농협의 공동출하를 떠올렸습니다. 왜 거기서는 이게 잘 안 될까. 답은 능력이 아니라 목적에 있었습니다. 농협은 더 많은 농가를 받아야 하고 형평성도 봐야 하니, 기준을 어긴 농가를 곧바로 빼기 어렵습니다. 이 조합의 첫 번째 책임은 바이어와 한 약속 하나입니다. 그래서 참여의 폭보다 규칙의 일관성을 앞에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조인 조직이 주문을 다 못 채우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더 이상 조합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배 한 알에는 봄의 며칠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배의 대부분은 신고라는 품종입니다. 이 나무는 스스로 씨를 맺지 못합니다.

배는 원래 같은 품종끼리는 수정이 잘 안 되는 작물입니다. 자기 꽃가루로는 열매를 못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고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갑니다. 쓸 만한 꽃가루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꽃가루로 수정을 못 하는 데다 남에게 줄 꽃가루도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과수원 안에 원황이나 화산 같은 다른 품종을 함께 심습니다. 농촌진흥청은 벌이 알아서 일하게 하려면 길게 보아 이삼십 퍼센트를 권합니다. 그게 아니면 사람이 직접, 다른 품종 꽃가루를 붓으로 발라 줍니다.

봄에 배꽃밭에서 사람들이 꽃 하나하나에 손을 대고 있는 장면. 그게 이 이야기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꽃이 수천 송이씩 달리고, 그걸 사람이 붓이나 기계로 하나씩 짚고 지나갑니다. 배 과수원의 봄 인건비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 저는 그 밭에 서서야 이해했습니다.

시간도 좁습니다. 꽃이 절반쯤 폈을 때, 한낮 몇 시간. 그때 꽃가루가 가장 잘 발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취재에서 가장 놀란 대목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 꽃가루를 상당 부분 수입합니다.

배 농가에게 꽃가루는 봄에 사야 하는 자재입니다. 2021년 무렵 삼사만 원 하던 것이 2025년 초에는 육만 원 선까지 오를 거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배 한 알에는 봄 며칠의 날씨와 수입 꽃가루 가격이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며칠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시기에는 영하 3도 안팎, 꽃이 활짝 핀 무렵에는 영하 1도 안팎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온도 하나로 피해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 해 농사의 상당 부분이 봄의 짧은 며칠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배 농사가 해마다 내리막인 것만은 아닙니다. 2025년 생산량은 전년보다 회복됐습니다. 그러니 진주에서 들은 말을 한국 배 전체의 사정으로 늘려 읽으면 안 됩니다. 그 시기, 그 품종, 그 규격에 맞는 배가 모자란다는 현장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조합을 흔든 건 봄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규칙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2024년, 고온과 강우가 겹치면서 햇볕에 데인 배가 나왔습니다. 껍질이 타고 모양이 무너지고 당도가 흔들렸습니다.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수출 규격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배입니다.

바이어가 요구하는 건 맛만이 아닙니다. 상자를 열었을 때 크기와 색이 고르게 놓여 있어야 하고, 몇 알이 어긋나면 그 상자 전체가 등급에서 밀립니다. 농가가 재배규정을 한 줄도 어기지 않았어도 상자에 담을 배는 줄어듭니다.

이 조합은 그 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17킬로그램 한 상자에 1만 5천 원씩 사들여 주스로 가공했고, 호주로 5톤 3천8백만 원어치를 내보냈습니다. 다만 주스는 피해를 덜어내는 방법이지, 주문받은 생과를 되살리는 방법은 아닙니다.

제가 진주에서 본 그 조직의 경계선이 여기였습니다. 이들은 규칙을 만들고, 농가별 기록을 모으고, 기준에 못 미치는 물량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어버린 암술과 햇볕에 데인 껍질은 규칙으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진주 마흔 농가만의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배 재배면적은 2005년 2만 1,735헥타르에서 올해 9,302헥타르로 줄었습니다. 스무 해 남짓 만에 절반 아래입니다. 다만 올해만 보면 지난해와 사실상 같습니다. 14헥타르, 0.1퍼센트가 줄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올해 눈여겨볼 숫자는 총면적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다 자란 나무 면적은 1.9퍼센트 늘어 8,477헥타르가 됐습니다. 반면 아직 열매를 못 맺는 어린 나무 면적은 16.9퍼센트 줄어 825헥타르입니다.

지금 딸 배는 있는데, 앞으로 딸 배가 줄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출 숫자는 더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2023년 배 수출액은 7,450만 달러였습니다. 그해 한국 과일 수출 1위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지난해 5,850만 달러로 내려왔습니다. 2년 만에 5분의 1이 사라진 겁니다.

같은 기간 딸기는 7,200만 달러 선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포도가 4,600만 달러에서 8,500만 달러대로 뛰었습니다.

1위였던 배는 3위가 됐습니다.

가는 곳도 좁습니다. 미국이 열에 여섯, 대만이 넷 중 하나로, 둘을 합치면 여덟 할이 넘습니다. 물량이 줄고 시장이 좁으면 한 해 날씨가 곧바로 수출 실적이 됩니다.

그런데 배를 3위로 밀어낸 그 포도. 저는 그 품종의 내력을 알고 나서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국가가 수출 산지를 만듭니다

그 포도는 샤인머스캣입니다. 1988년 일본의 연구기관이 만들었고 2006년에 일본 안에서 품종 등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등록을 제때 하지 않았습니다.

품종 보호는 나라마다 따로 신청해야 효력이 생깁니다. 일본이 그 절차를 놓친 사이 한국과 중국의 밭에 샤인머스캣이 퍼졌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그 포도를 기르는 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일본은 그 대가를 숫자로 계산해 뒀습니다. 중국에서의 무단 재배분만 놓고 현지 출하가격에 통상적인 허락료 비율을 곱해, 한 해 100억 엔이 넘는다고 시산합니다. 실제로 걷지 못한 돈이 아니라 걷었다면 이만큼이었을 돈입니다. 그 계산을 해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 나라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보여줍니다. 2020년에는 종묘법을 고쳐 등록 품종의 해외 반출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2030년까지 농림수산물·식품 수출을 5조 엔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걸고, 중점 품목을 서른 개 넘게 지정해 품목마다 나라별 목표와 수출 산지 수를 세웠습니다. 수출용 생산과 유통으로 산지 자체를 바꾸는 사업에 예산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진주의 마흔 농가가 스스로 한 일을, 일본에서는 국가가 품목마다 설계합니다.

물론 한국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배 수출 검역을 타결한 나라가 열여덟 곳, 수출단지는 일곱 곳으로 늘었고, 올해 상반기 배 수출액은 1년 전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지금 밀고 있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2024년 스마트농업 육성법이 시행됐고, 노지 스마트농업 시범지구가 전국 아홉 개 시군에 지정됐습니다. 3년에 440억 원 규모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진주 사무실의 그 책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스마트농업은 기술을 깔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표가 없으면 센서는 숫자만 뱉고, 데이터가 없으면 인공지능은 배울 게 없습니다. 집행력이 없으면 분석 결과는 권고로 끝나고, 규모가 없으면 효과가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진주의 그 조합에는 그 넷이 다 있었습니다. 바이어와 한 약속이라는 목표, 농가별로 쌓인 생산기록, 지키지 않으면 출하에서 빠지는 규칙, 그리고 마흔 농가라는 규모.

연구는 이런 곳에서 해야 합니다. 정부 연구기관이 개발한 개화기 예측, 저온 경보, 인공수분 기술, 고온 대응 재배법이 시험포장 안에서만 검증되고 끝나면 현장에 닿는 데 다시 십 년이 걸립니다. 데이터와 집행력을 가진 산지와 연구기관이 같은 목표를 놓고 붙어야, 기술이 논문이 아니라 상자에 담기는 배로 바뀝니다. 폭염을 이겨내는 기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그 답은 실험실이 아니라 규칙이 작동하는 산지에서 나올 겁니다.

꽃가루를 주려고 심은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 상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조합 대표가 보낸 배 한 상자였습니다. 진주에서 저를 초대하며 배가 나오면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이었습니다. 제가 맛을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외국 사람들이 한국 배의 무엇을 보고 지갑을 여는지 궁금했습니다. 호주로 나간 그 물량과 같은 배라고 했습니다.

품종을 보고 저는 잠깐 멈췄습니다. 원황이었습니다.

원황은 8월에서 9월에 따는 조생종입니다. 그런데 이 품종, 앞에서 이미 한 번 나왔습니다. 신고 과수원에 함께 심는 그 수분수 품종입니다.

신고가 스스로 씨를 맺지 못해서 꽃가루를 주려고 심어둔 나무. 그 나무의 열매가 컨테이너에 실려 시드니로 갔습니다.

먹어 봤습니다. 좋았습니다. 단맛이 혼자 앞서지 않고, 물기가 많은데도 사각거리는 식감이 끝까지 남았습니다. 수분수의 열매라는 사실을 알고 먹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선적식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폭염이 이어져서 수출농가의 작업 여건과 안전을 생각해 행사를 접었다고 합니다. 기후 이야기를 하던 그 여름에, 기후 때문에 행사가 사라지고 배만 떠난 겁니다.

제가 이 조합에서 가능성을 본 곳은 사실 사무실이었습니다. 농가 기록을 프로그램으로 돌리던 그 사람들, 조합을 처음 만든 핵심 농가들의 자녀 세대입니다. 이들이 지금 붙잡고 있는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농가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관리하는 일, 다른 하나는 여름 무더위를 넘기는 방법을 찾는 일입니다. 아버지 세대가 규칙을 만들어 조직을 묶었다면 이 세대는 그 규칙 위에 데이터를 얹고 있습니다.

물려받은 것이 과수원만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점이 저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원황이 호주로 갔다는 소식이 저는 더 반가웠습니다.

농산물이 수출 산업이 될 수 있을까. 저는 이게 한국 농업의 미래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앞으로 딸 배가 줄어든다는 신호는 이미 통계에 나와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 농산물로도 해외를 개척할 수 있다는 건 이들이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명 위에 무엇을 얹을지는 이제 조합만의 몫이 아닙니다. 규칙이 작동하고 데이터가 쌓이는 산지가 여기 있습니다. 기술을 가진 연구기관은 저쪽에 있습니다. 이 둘이 만나지 않으면 다음 폭염은 또 상자 밖으로 밀려난 배로 돌아옵니다.

상자를 열었습니다. 크기도 모양도 비슷한 배가 줄 맞춰 놓여 있었습니다. 그건 지난봄 누군가가 꽃 하나하나에 붓을 댔다는 뜻이고, 그 봄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상자가 시드니까지 갈 수 있게 마흔 농가가 같은 규칙을 지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사단법인 식량과기후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