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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은행에 넘기면 끝날까요

전수조사가 연 문 앞에서, 누가 농지를 경영할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농지 전수조사가 농업에 큰 분기점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본조사에서 심층조사 대상으로 분류된 농지는 조사 필지의 27%였습니다. 사유별로는 불법 임대차가 21.1%, 무단 휴경이 11.6%로 가장 많았습니다. 투기보다 소유와 경작이 갈라진 땅이 훨씬 많았다는 뜻입니다.

정부의 방향은 「특별조치법 제정 → 농지법 개정」으로 정해졌습니다. 지금 제도에서 위반인 상태를 풀어 주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법을 고치는 순서입니다. 판을 벌였을 때부터 이 수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10월 8일에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투기가 아니면 처분하지 않고, 농지은행 위탁도 처분을 면하는 조건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농지은행입니다.

무게추는 이용 쪽으로 옮겨 갑니다

이번 논란의 뿌리는 농지의 소유와 이용이 넓게 갈라진 데 있습니다. 경자유전을 소유 중심으로 해석해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무게추는 천천히 이용 쪽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매개자이자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 농지은행입니다. 위탁은 선택이 되었지만 매입은 늘어납니다. 정부는 내년 농지은행의 매입·공급 규모를 올해 5,230ha에서 6,800ha로 늘려 잡았습니다. 어쨌든 농지은행이 위탁받은 면적도 커집니다. 공공이 가진 땅을 공공이 빌려주는 몫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럼 농지은행에 농지를 넘기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공공은 형평으로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헌법 121조 2항은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농지를 합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임대차와 위탁경영을 인정합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농지가 핵심경영체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공기관인 농지은행은 형평성을 기준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격 기준을 두고, 신청자 사이의 공정을 따지고, 민원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임대는 여러 경영체로 나뉘어 흩어집니다. 임대차를 허용한 헌법의 근거인 생산성 제고와 부딪히는 결과입니다.

사인 간 임대차를 허용해도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 영향은 세대교체와 농업의 지속 가능성으로 이어집니다. 한 번 나눠 준 임차권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잘게 나뉜 채로 10년, 20년이 굳어지면 다음 세대 경영체가 규모를 갖출 기회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렇게 되면 정리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쁜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먼저 정할 것은 누가 경영하느냐입니다

그래서 먼저 정해야 할 것은 누가 농지를 경영해야 하는가입니다.

소유권 중심일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던 문제입니다. 땅 주인이 빌려줄 사람을 정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정부가 중간에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여느 정부 정책처럼 자격 기준을 따지고 형평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결정은 누가 해야 할까요?

일본은 같은 고민을 먼저 겪었습니다. 2014년 농지중간관리기구를 만들어 농지를 모았지만, 핵심경영체에 농지의 80%를 모은다는 목표에 한참 못 미쳤습니다. 목표 해인 2023년의 집적률은 60.4%였습니다. 결국 2022년 법을 고쳐, 이듬해부터 누가 어느 필지를 경작할지 마을 단위 지역계획에서 정하게 했습니다.

서둘러서는 안 되는 쪽은 그다음입니다

이 논쟁이 미래 한국 농업의 구조와 주체, 그리고 식량안보를 결정할 것입니다.

특별조치법은 연내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농지법 개정까지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충분한 숙의로 원칙을 먼저 정하고, 그 원칙을 구현할 방법을 하나씩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역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있습니다. 전수조사 덕분에, 혹은 전수조사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농업의 미래를 다시 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에는 잘해 봤으면 합니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사단법인 식량과기후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