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량안보 시리즈 1
마루베니 — 일본 식량안보의
보이지 않는 거인
1973년 미국이 갑자기 대두 수출을 막았을 때, 일본 슈퍼마켓에서는 두부가 사라졌습니다. 그 충격에서 출발한 한 회사가 47년 후 일본·중국·한국으로 가는 미국 곡물의 약 20%를 통제하게 됩니다. 이름은 Columbia Grain, 모회사는 마루베니(丸紅).
두 개의 장면
1973년 7월, 도쿄.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두부가 사라졌습니다. 미국이 한 달 전 대두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대두 수입의 약 9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두부, 된장, 간장 — 일본 식탁의 절반이 흔들렸습니다.
2025년 4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Pacificor 수출터미널에서 110칸짜리 곡물 열차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도착합니다. 곡물은 곧 태평양을 건너 후쿠오카로 향합니다. 연간 약 600만 톤. 이 흐름의 모든 단계는 한 일본 회사의 자본으로 통제됩니다.
이 두 장면을 잇는 회사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식량안보의 절반을 떠받치는 회사. 마루베니입니다.
1. 1858년의 마(麻) 한 필 — 마루베니의 DNA
마루베니는 1858년 시가현(滋賀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6세 소년 이토 추베이(伊藤忠兵衛, 1842~1903)가 마(麻) 한 필을 등에 짊어지고 행상에 나섰습니다. 1872년 그는 오사카 센바(船場)에 작은 직물점 ‘베니츄(紅忠)’를 열었습니다. 가게의 붉은(紅, beni) 둥근(丸, maru) 도장이 오늘날 마루베니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출발점은 중요합니다. 일본 5대 종합상사는 흔히 한 묶음으로 다뤄지지만, 출신과 DNA가 다릅니다.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는 자원·중공업 기반의 자이바츠(財閥) 출신이고, 마루베니와 이토추(Itochu)는 섬유·소비재 기반의 오미(近江) 상인 출신입니다. 뿌리를 공유하던 두 회사는 1921년에 분리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루베니는 자원이 아니라 식생활·의생활에 닿는 사업으로 자랐습니다. 곡물·식품 사업은 마루베니에게 부수적 영역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마루베니의 식품·농업 부문 자산은 2조 4,747억 엔(약 24조 원)으로, 전사 자산 9.2조 엔의 26.9%를 차지합니다. 단일 사업 부문 중 가장 큽니다.
2. 1973년 여름, 도쿄의 공포 — 두 위기의 동시 발생
외부의 충격: 닉슨의 대두 금수령
1973년 6월 27일, 닉슨 행정부는 갑작스럽게 대두와 면실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미국 내 식품 가격 폭등을 잡기 위한 대내용 조치였지만, 외부에서 본 충격은 컸습니다. 일본은 그해까지 대두의 약 90%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금수 조치는 두 달 만에 풀렸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년 뒤 일어난 1차 오일쇼크(1974)보다 1973년 대두 위기가 더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하는 일본 가정주부와 관료들이 많았습니다. 식량은 에너지보다 더 즉각적이고 일상적인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빨랐습니다. 통상산업성(MITI)은 곧바로 “개발수입(開発輸入)”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단순 수입 의존을 줄이고 해외에 직접 투자해 자원과 식량을 확보한다는 전략입니다. 1974년 JICA(국제협력기구)가 설립되었고, 1979년에는 브라질 세하두(Cerrado)의 대두 개발 프로그램(PRODECER)이 시작되었습니다.
내부의 위기: 마루베니의 두 스캔들
같은 시기, 마루베니 자체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73년 쌀 사재기 비난과 1976년 2월 록히드 스캔들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록히드 스캔들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전 총리가 체포되고 40개 이상의 지자체가 마루베니와의 계약을 해지한 일본 최대 정치 스캔들이었습니다.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습니다. 비자원·소비재 종합상사로서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고, 일본 식량안보 차원에서 정치적 명분도 있는 그런 사업이 필요했습니다. 답은 곡물이었습니다. 1978년, 마루베니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한 작은 자회사를 설립합니다. 이름은 Columbia Grain Inc.
마루베니의 곡물 사업이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두 위기 — 외부 식량 충격과 내부 윤리 추락 — 가 한 회사를 새로운 길로 밀어붙인 결과였습니다.
3. 1978년, 포틀랜드의 결단 — 산지 정착 모델의 47년
시작은 단 3개의 엘리베이터
Columbia Grain의 첫 자산은 워싱턴주 Central Ferry의 곡물 엘리베이터를 포함한 단 3곳이었습니다. 이후 47년간의 확장은 점진적이었습니다. 워싱턴·오리건·아이다호·몬태나·노스다코타·사우스다코타·미네소타·네브래스카까지 미국 북부 8개 주로 자산을 늘려가면서, 처음에는 밀 중심이던 취급 품목이 옥수수와 대두로 확대되었습니다. 현재 약 8,000명의 미국 농민과 직접 거래합니다.
수직 통합의 완성
1998년, 마루베니·ADM·Agrex 3사가 합작해 KEC(Kalama Export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2013년 마루베니가 Gavilon을 인수하면서 구조를 재편했고, 2014년 포틀랜드 5번 부두 수출 엘리베이터를 통합해 Pacificor로 개명했습니다. Columbia Grain은 지주사(Kalama Holdco)를 통해 Pacificor의 실효 지분 약 45%를 통제합니다.
미국 농가에서 일본 가공 공장까지, 한 단계도 제3자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곡물의 모든 단계 — 수매, 검사, 저장, 철도 운송, 수출 선적, 일본 도착 항만, 가공 공장 — 가 일본 자본으로 통제됩니다.
일본만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도 마루베니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한국이 수입하는 미국 곡물의 상당량은 사실 마루베니의 인프라를 거쳐 옵니다.
4. 보이지 않는 손 — 일본 정부의 역할
마루베니 혼자 이룬 성과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법·금융·외교 인프라가 받쳐준 결과입니다.
| 정책 도구 | 일본 | 한국 |
|---|---|---|
| 농정 기본법 | 식량·농업·농촌 기본법 (1999, 2024 개정) | 분산 (단일 기본법 부재) |
| 위기대응법 | 식량공급곤란사태대책법 (2024) | 없음 |
| 정책금융 | JBIC 해외투자융자 (수십 년 운영) | 농식품부 융자 (2년 연속 집행 0원) |
| 정치 리스크 보험 | NEXI 수출투자보험 | 사실상 부재 |
| 정부 컨트롤타워 | 농림수산성 식량정책안보실 | 농식품부 일반 부서 |
출처: US State Dept Investment Climate Statements (2025), KOTRA 오사카 무역관, 농림축산식품부
JBIC(국제협력은행)는 일본 기업의 해외 자원·식량 확보 프로젝트에 장기 저리 융자를 제공합니다. NEXI(일본수출투자보험)는 해외 정치 리스크에 대한 보험을 제공합니다. 두 기관 덕분에 마루베니가 해외 곡물 자산에 30년 이상의 인내자본을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제정된 「식량·농업·농촌 기본법」은 일본 농정의 헌법으로 불립니다. 2024년 6월에는 25년 만에 대폭 개정되어 평상시·비상시 식량안전보장 강화가 명시적 목표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제정된 「식량공급곤란사태대책법」은 비상시 정부가 농가에 증산을 명령하고 사업자에게 판매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대비되는 한국의 현실은 단순합니다. 한국에는 식량안보의 법적 정의 자체가 없습니다. 2023년 도입된 500억 원 규모 해외 곡물망 융자 사업은 2년 연속 집행 0원을 기록했습니다.※
5. Gavilon의 교훈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마루베니조차 빠른 길의 유혹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27억 달러의 도박
2013년, 마루베니는 미국 곡물 3위 기업 Gavilon Holdings를 27억 달러(약 3조 원)에 인수했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ADM, 카길, 번지, LDC와 같은 글로벌 곡물 메이저로 단번에 도약하는 것.
9년의 좌절
인수 직후부터 곡물 가격은 하락했고 손실이 누적되었습니다. 2017년 회계연도에만 1억 8천만 달러 손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도쿄 본사 임원들이 미국 현지 트레이딩 의사결정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022년 1월, 마루베니는 Gavilon을 Viterra에 11억 2,500만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매각 발표 자리에서 마루베니 부사장 데라카와 아키라(寺川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ADM이나 카길 같은 글로벌 곡물 트레이더가 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장 리스크에 더 노출되었을 뿐이다. 인수가가 너무 높았고, 일본 본사 임원들은 미국 현지 임원들의 의사결정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 Reuters, 2022년 1월
마루베니가 매각 과정에서 보인 판단력이 주목됩니다. Gavilon이 보유하던 미국 북부 8개 엘리베이터와 Pacificor 합작 지분은 매각에서 제외하고 Columbia Grain으로 이전했습니다. 사실상 Gavilon에서 알짜만 골라 47년의 정착 모델 안으로 흡수하고, 나머지는 정리한 것입니다.
6. 데이터로 본 마루베니 식량 사업의 진짜 규모
매출만 보면 마루베니의 곡물 사업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자산과 통제력으로 보면 그림이 달라집니다.
Columbia Grain의 단독 순이익은 18억 엔(약 180억 원)입니다. 마루베니 그룹 전체 순이익 5,030억 엔의 0.36%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마루베니는 왜 곡물 사업을 47년째 유지하는가?
답은 마진이 아니라 통제력입니다.
| 자산 | 규모 | 가치의 성격 |
|---|---|---|
| 산지 엘리베이터 | 60개 이상 | 47년 누적 |
| 직접 거래 농민 | 약 8,000명 | 시간으로만 가능 |
| 수출터미널 실효 통제 (Pacificor) | 약 45% (지주사 경유) | 일본까지 직통 출구 |
| 일본 도착 터미널 (PGT) | 80% 지분 | 수입 끝까지 통제 |
| PNW 시장 점유율 | 약 20% | 카길·번지·CHS와 경쟁 |
| 연간 취급량 | 약 600만 톤 | 일본 곡물 수입의 핵심 축 |
출처: Marubeni Scope #43 (2024), Columbia Grain 공식 자료, 2025년 4월 Central Ferry 매각 보도
곡물 사업은 단기 이익이 아니라 전체 식량 가치사슬의 통합 도구입니다. Columbia Grain의 곡물은 마루베니 사료 자회사(Marubeni Nisshin Feed)의 원료가 되고, 사료는 미국·호주 비프로 이어지며, 비료(Helena)는 산지 농가를 잡아둡니다. 곡물은 그 자체로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라, 마루베니 식품·농업 부문 전체를 떠받치는 인프라입니다.
7. 한국이 마루베니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루베니를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47년의 역사를 단번에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루베니의 47년에는 시간을 사지 않고도 참고할 수 있는 세 가지 본질이 있습니다.
첫째, 위기를 정책 패키지로 전환하는 능력입니다. 1973년 닉슨 쇼크 이후 일본 정부는 즉시 “개발수입” 정책을 채택했고, 1년 안에 JICA를 만들었으며, 6년 안에 브라질 세하두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한국은 2008년 식량위기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두 번의 충격을 겪고도 정책의 실질적 전환을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둘째, 민간이 앞서 가고 정부가 뒷받침하는 분업 구조입니다. 일본은 종합상사가 의사결정의 중심이고, JBIC·NEXI·농림수산성이 30년 이상의 인내자본·리스크 보험·외교 지원으로 보조합니다. 한국은 정부가 컨트롤타워가 되려다 민간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구조에 머물러 있습니다.
셋째, 정착이지 인수가 아닙니다. Columbia Grain의 47년 모델은 처음에는 작게 시작해 농민과 신뢰를 쌓고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이었습니다. Gavilon 인수의 9년 좌절은 큰 돈으로 단번에 사들이는 전략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마루베니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한국은 식량안보를 위해 30년을 인내할 수 있는 정책 인프라를 가졌는가?
다음 편 예고
다음 시리즈 #2에서는 일본 5대 종합상사의 곡물 사업을 비교합니다. 미쓰이의 미국 United Grain과 브라질 Multigrain 실패, 미쓰비시의 Olam Agri 인수, 이토추의 중국 CITIC 제휴 — 각 상사의 다른 전략, 다른 결과가 한국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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